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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재 요셉 부제

광암 이벽 선생 - 한국교회 초창기 주역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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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2-09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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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문/ 미주판/ 이창재 부제 (12/15/2002)

광암 이벽 선생

(한국 교회 초창기 공동체의 주역)

대림 3주일의 메시지는 세례자 요한의 입을 통하여 메시아가 우리 가운데 와 계심을 선언하고 있다.  사람들이 “당신은 누구요?” 하고 요한의 신원을 물었을때, 요한이 말하였다.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 나는 ‘주님의 길을 바르게 하라’ 고 광야에서 부르짖는 이의 소리요.” (요한 1; 23)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을 맞기 위하여 기다리는 우리는 먼저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이 웨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요한은 구세주의 오심을 알려주는 예언자 이사야의 메시지를 가지고 자기 신원을 밝히면서, 직접 우리에게 주님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회개시키려고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베풉니다. 내 뒤에 오시는 그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  (마태오 3; 11)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가르켜 “이 사람으로 말하면 ‘보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먼저 보내니 그는 너에 앞서 네 길을 닦아 놓으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그 사람입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 세례자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라고 증언 하셨다.

 200여년 전에 서학이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가운데 우리 겨레에게 신앙의 싹이 터 우리 선조들이 주님을 맞이하게 될 때에도 역시 우리 겨레에게 ‘주님의 길을 열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예비한 우리겨레의 요한이 있었으니 그분이 바로 겨레의 신앙 선각자요 우리 신앙공동체의 첫 사도이신 광암 이벽(세례자 요한) 선생이시다.

이벽 선생은 영조 30년(1754 AD)에 대대로  벼슬을 지낸 무반의 가문에서 태어 났다. 부친은 그 뛰어난 재질을 보고 당연히 그의 형제와 함께 무관으로 입신시키려 하였으나 선생은 한낱 포의서생으로 그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등과하지 않은 채 오로지 성현의 글을 배워 선비로서 학문, 사상과 정신세계에 심취하였다. 물론 선생도 처음에는 다른 선비들과 더불어 유학(성리학)을 공부하여 깊은 지식을 가졌으나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고, 후에 중국에서 들어온 한문 서학서를 얻어 보고 거기에 더욱 심취하게 되고 결국 천주학의 도리에 깊이 각성되어서 드디어 서학에서 천주신앙으로 그 신앙실천운동을 이끌어 한국(조선)천주교회의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1779년 겨울, 당대의 석학 권철신의 주도하에 천진암에서 열렸던 강학회에 그의 동생 권일신과 정약용, 정약전 형제, 그리고 이승훈등 서학에 관심을 가진 여러 선비들이 모여 서학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하게 되는데,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눈길을 헤치고 찾아간 이벽 선생이 참석하여 서학에 대한 학구적 연구에서 신앙 실천운동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모두 이벽 선생의 영향을 받아서 천주교 신앙을 가지게 되고 오늘날 이분들은 모두 천주교 신앙을 자발적으로 출발시킨 한국 천주교 창립 선조들로 알려져 있다.

1784년 동지사로 북경에 들어가는 아버지를 따라 간 이승훈 선생이 프랑스 선교사 그라몽 신부에게서 조선교회의 초석이 되라고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 다음, 이벽 선생을 비롯한 창립 선조들이 차례로 세례를 받았지만, 이들 모두에게 천주신앙을 일깨워 준 장본인은 바로 이벽 선생이었으니, 이승훈 선생까지도 이벽 선생을 신앙의 스승으로 하였고, 이승훈 선생의 아버지가 동지사로 되어 북경에 가게 되니 이벽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모금하여 이승훈 선생의 여비를 마련하고 이승훈 선생에게 북경에 들어가면 먼저 천주당(성당)을 찾아가 서양 선교사를 만나서 천주교를 배우고 서책도 받아 오도록 당부하였다.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 선생이 가지고 온 천주교 서적을 받아 가지고 조용한 집에 집거한 지 수 삼일후, 밖에 나온 이벽 선생은 ‘천주님께서 이 겨레와 나라를 긍률히 보사 천주교 진리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노라.’ 하시고, 이승훈 선생에게 ‘세례자 요한’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니 선생께서는 당신이 받은 사역이 무엇인지를 이미 깨달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교회창립의 초석이 된 선조들은 모두 이벽 선생과는 학연과 인척으로 관련되어 있는 남인시파 계열로 강한 유대를 가지고 있으며, 전하는 기록에 의하건대 이벽 선생은 서학에 종사하기 이전에 벌써 경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기 때문 이들 중에서도 지도적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후 이벽 선생은 서학에 대한 선구적 탐구로 남다른 정열을 보였고, 이미 언급한 천진암 강학회(1779년)로 부터는 신앙 실천적 선구자의 뚜렷한 역할을 하게 되고, 1784년 이승훈 선생의 귀환과 더불어 모두 영세 입교하여 최초의 신앙 공동제를 이룩하게 된다.

또한 이벽 선생의 선학의 위치에 있던 이가환 선생과의 관계를 잠시 살펴 보면 이벽 선생이 어느만큼이나 광야의 선구자였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가환 선생의 명성은 수다한 기록 사료에 서술되어 있듯이 당대의 석학이요, 정조가 진학사라고 극찬하였던 것으로 보아, 학자로서의 진 면목을 갖추었던 인물이었다. 당대 학자중에서도 특히 수학에 있어서 제일인자로 꼽히는 인사였다. 공조판서였던 이가환 선생과 포의서생이었던 이벽 선생과의 관계에서, 이벽 선생이 천주교를 믿고 따른다 함을 들은 이가환 선생이 그를 책하기 위해 찾아갔다가 오히려 그가 ‘이치를 따져 답변을 함에’ 완전히 설복되어 교리서를 얻어가 읽고, 반복하여 읽고 난 뒤에 서학을 믿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렇듯 포의서생 광암 이벽 선생의 의식 개발은 당대의 대 석학 이가환 선생을 설복함으로써 천주교에 대한 선구적 이해가 차원 높게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굽은 길을 바르게 만들라.” (루가 3;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