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adalupe 성지 순례
Chairman's Corner
이창재 요셉 부제
Visiting N. Korea (1-3) 북의 외교에 그리스도 문화를 / (2) 사라진 꿈(최참사의 행방)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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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2-09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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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1-3) 북의 외교에 그리스도 문화를 / (2) 사라진 꿈(최참사의 행방)
1990년 평양 방문(1-3) / 김일성 대학을 방문하여
국제 외교무대에서 외교관이 서로 교류하는데 그리스도문화와 전통을 숙지하는 것이 상식인데 현재 북의 외교요원들은 이점이 부족하다고 보는데 새로운 외교성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교문화와 전통에 대한 안내 교육방안은 무었인가? ㅇ 요원의 선발: 김일성대학생으로 민족주체성과 당성분이 투철하고 그리스도교문화와 전통에 관심이 있는자를 선발. ㅇ 요원의 교육: 이창재가 교원이 되어 주체신앙과 그리스도교 특히 현대 세계 및 각국 가톨릭 현항중심으로 안내 강의할 것이라는 기본구상에 우리는 합의하였다. 그래서 그는 김일성대학 역사학부안에 종교학 강좌를 개설하기로 하고, 다음날 김대를 방문하여 부장교수를 만났다. 김대에서는 학생선발을 맞고 나는 미국에 돌아와 관계교재자료를 북경우체국 국제사서함을 통하여 최 참사에게 우송하기로 약속하고,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나는 매년 6개월 동안 김대 강사로 북에 체류하기로 약속한 다음, 큰 기대감을 간직한 상태로 미국에 귀환하였다. 김일성대생중에서 당성이 투철한자를 선발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새로운 교육의 결과로 그들이 그리스도교사상으로 전향하지 않게 하겠다는 보중이며, 나 또한 요원교육의 교원으로서 우리조상들과 함께 조국의 사명과 조선천주교회의 주체성을 강조하며, 그리스도교문화와 전통을 안내 교육할 때 가급적이면 전향적으로 강의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임하는자세였다.
나는 우선 내 책장에 소장하고 있는 책중에서 세계 및 조선(한국)천주교회 역사와 제II차 바디칸 공의희 문헌, 그리스도교 사상사, 그리고 현대 남미 해방신학과 제3세계의 민중신학에 대한 책과 신판 로마 가톨릭 교회와 미국교회 연감등을 포장하여 발송하였다. 마침 미국에 귀환한 다음 1991년부터 나는 Permanent Deacon으로서 미 원주민 사목실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전례의 토착화에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그리스도교문화와 전통의 다양한 민족적 토착화에 대한 생각으로 제3세계의 다양한 그리스도교 현황에 대한 책도 추가 발송 하였다. 이렇게 1991년을 나는 새로운 비젼으로 고무되어 희망에 찬 한해를 보냈다. 그런데 북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는 것이었다.
1992년은 현대 가톨릭성령운동이 일어난지 25주년이 되는 해인데 미주가톨릭성령운동본부의 권유로 미주한인성령운동본부를 설립하고 회장(박창득신부)를 보좌하여 나는 상임집행위원이라는 중책을 맡아 동분서주, 나는 미주 각도시의 한인공동체를 방문하여 오순절 세미나를 지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주 전역에 동서남북으로 9개의 지역봉사회를 조직하기 위하여 바쁘게 뛰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북에서의 사명을 거두시고 미주한인공동체와 교우들의 신앙쇄신과 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하여 미천한 이 종을 잠시 활용 하셨는지 알 수 없으나, 나는 천직을 만난듯 즐겁고 기쁘게 매일 밤낮으로 이 사역에 투신하여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1996년 평양 방문(2) 사라진 꿈 (최철만 참사의 행방)
나는 1995년에 8월(민족해방50돐경축대회)에 미주 대표단의 일원으로 제2차 평양방문을 하였다. 이번에는 그동안 대북 지원사업을 해 오신 박창득 신부와 동행이었다.
평양에 도착한 나는 예상한 대로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안내원에 의하여 인도를 받았는데 지난번에 인사를 나눈 분이어서 최참사의 안부를 문의한 바, 간단히 원호위원회에서 다른 부서로 이동 하였다고 하며, 다른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곳에 체류하며 시내와 인근을 견학하고 주일에는 성당에도 갖지만 아무도 내게 최참사의 안부나 면담을 주선하는 사람은 찾지 못하였다. 나의 기대와 희망은 절망스러운 벽에 부디치고 말았다. 아마도 최참사의 소식을 나에게 알리는 것은 해외동포원호위원회의 금기사항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장래를 위하여 내 심중을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요원들을 대하며, 후임 참사들과도 잘 지냈다. 특히 안내원과는 서로 가족 이야기도 나누면서 친하게 지냈다. 방문일정을 마감하고 실망을 앉은채 다음 사업을 기약하고 돌아 왔다. 우리는 조선천주교인연합회 위원장 장재건씨와 더불어 1996면 11월 남북/북남 그리고 미주동포 천주교인 세미나를 미국에서 가지기로 합의하고, 남북 그리고 미주대표 각각 5명씩 초청하기로 하였다. 집에 돌아 온후 좀 뒤에는 북경 국제우체국에 보낸 서적들도 수취인 거부를 이유로 모두 되돌아 왔다. 되돌아 온 포장을 열면서 이 책들을 포장할 때의 희망과 기대를 생각하게 되니 하느님 앞에서 사람이 하는 일이 얼마나 무상한가 실감하면서 하느님의 권능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역시 나의 관심사는 최(철만)참사의 행방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제3차 평양방문의 기회를 기다렸다.
1990년 평양 방문(1-3) / 김일성 대학을 방문하여
국제 외교무대에서 외교관이 서로 교류하는데 그리스도문화와 전통을 숙지하는 것이 상식인데 현재 북의 외교요원들은 이점이 부족하다고 보는데 새로운 외교성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교문화와 전통에 대한 안내 교육방안은 무었인가? ㅇ 요원의 선발: 김일성대학생으로 민족주체성과 당성분이 투철하고 그리스도교문화와 전통에 관심이 있는자를 선발. ㅇ 요원의 교육: 이창재가 교원이 되어 주체신앙과 그리스도교 특히 현대 세계 및 각국 가톨릭 현항중심으로 안내 강의할 것이라는 기본구상에 우리는 합의하였다. 그래서 그는 김일성대학 역사학부안에 종교학 강좌를 개설하기로 하고, 다음날 김대를 방문하여 부장교수를 만났다. 김대에서는 학생선발을 맞고 나는 미국에 돌아와 관계교재자료를 북경우체국 국제사서함을 통하여 최 참사에게 우송하기로 약속하고,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나는 매년 6개월 동안 김대 강사로 북에 체류하기로 약속한 다음, 큰 기대감을 간직한 상태로 미국에 귀환하였다. 김일성대생중에서 당성이 투철한자를 선발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새로운 교육의 결과로 그들이 그리스도교사상으로 전향하지 않게 하겠다는 보중이며, 나 또한 요원교육의 교원으로서 우리조상들과 함께 조국의 사명과 조선천주교회의 주체성을 강조하며, 그리스도교문화와 전통을 안내 교육할 때 가급적이면 전향적으로 강의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임하는자세였다.
나는 우선 내 책장에 소장하고 있는 책중에서 세계 및 조선(한국)천주교회 역사와 제II차 바디칸 공의희 문헌, 그리스도교 사상사, 그리고 현대 남미 해방신학과 제3세계의 민중신학에 대한 책과 신판 로마 가톨릭 교회와 미국교회 연감등을 포장하여 발송하였다. 마침 미국에 귀환한 다음 1991년부터 나는 Permanent Deacon으로서 미 원주민 사목실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전례의 토착화에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그리스도교문화와 전통의 다양한 민족적 토착화에 대한 생각으로 제3세계의 다양한 그리스도교 현황에 대한 책도 추가 발송 하였다. 이렇게 1991년을 나는 새로운 비젼으로 고무되어 희망에 찬 한해를 보냈다. 그런데 북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는 것이었다.
1992년은 현대 가톨릭성령운동이 일어난지 25주년이 되는 해인데 미주가톨릭성령운동본부의 권유로 미주한인성령운동본부를 설립하고 회장(박창득신부)를 보좌하여 나는 상임집행위원이라는 중책을 맡아 동분서주, 나는 미주 각도시의 한인공동체를 방문하여 오순절 세미나를 지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주 전역에 동서남북으로 9개의 지역봉사회를 조직하기 위하여 바쁘게 뛰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북에서의 사명을 거두시고 미주한인공동체와 교우들의 신앙쇄신과 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하여 미천한 이 종을 잠시 활용 하셨는지 알 수 없으나, 나는 천직을 만난듯 즐겁고 기쁘게 매일 밤낮으로 이 사역에 투신하여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1996년 평양 방문(2) 사라진 꿈 (최철만 참사의 행방)
나는 1995년에 8월(민족해방50돐경축대회)에 미주 대표단의 일원으로 제2차 평양방문을 하였다. 이번에는 그동안 대북 지원사업을 해 오신 박창득 신부와 동행이었다.
평양에 도착한 나는 예상한 대로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안내원에 의하여 인도를 받았는데 지난번에 인사를 나눈 분이어서 최참사의 안부를 문의한 바, 간단히 원호위원회에서 다른 부서로 이동 하였다고 하며, 다른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곳에 체류하며 시내와 인근을 견학하고 주일에는 성당에도 갖지만 아무도 내게 최참사의 안부나 면담을 주선하는 사람은 찾지 못하였다. 나의 기대와 희망은 절망스러운 벽에 부디치고 말았다. 아마도 최참사의 소식을 나에게 알리는 것은 해외동포원호위원회의 금기사항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장래를 위하여 내 심중을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요원들을 대하며, 후임 참사들과도 잘 지냈다. 특히 안내원과는 서로 가족 이야기도 나누면서 친하게 지냈다. 방문일정을 마감하고 실망을 앉은채 다음 사업을 기약하고 돌아 왔다. 우리는 조선천주교인연합회 위원장 장재건씨와 더불어 1996면 11월 남북/북남 그리고 미주동포 천주교인 세미나를 미국에서 가지기로 합의하고, 남북 그리고 미주대표 각각 5명씩 초청하기로 하였다. 집에 돌아 온후 좀 뒤에는 북경 국제우체국에 보낸 서적들도 수취인 거부를 이유로 모두 되돌아 왔다. 되돌아 온 포장을 열면서 이 책들을 포장할 때의 희망과 기대를 생각하게 되니 하느님 앞에서 사람이 하는 일이 얼마나 무상한가 실감하면서 하느님의 권능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역시 나의 관심사는 최(철만)참사의 행방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제3차 평양방문의 기회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