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adalupe 성지 순례
Chairman's Corner
이창재 요셉 부제
Visiting N. Korea (3) 북한 농업지원사업 / (4) 천명
Author
ad***
Date
2023-02-09 13:58
Views
358
1996년 평양 방문 (3) 북한 농업지원사업
그동안 나는 존경하는 부부가 주관 해온 북한 농업지원사업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선배이신 이사장이 병환으로 작고하신 다음 종자 전문가인 부인께서 재단 이사장이 되었고, 내가 부이사장을 맞게 되었다. 북에서는 이 분의 애국충정과 종자분야에서의 세계적인 전문성을 알고 농업성에서 직접 초청하고 자문하는 관계였다. 그리하여 오래전 부터 이분은 미국과 서구 선진농업 기술로 낙후한 북의 농업진흥을 위하여 도와주고 있었다. 수년전 처음에 이분을 만나서 관계를 맺게 한 사람이 또한 최(철만)참사였다. 그래서 이분도 최참사의 행방에 대하여 대단히 궁금해 온 터였다. 그간 이분은 거의 매년 두번씩, 봄 가을로 북행을 하면서 최참사를 만나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한채 이번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직영농장을 위하여 특별지도 자문차 방문하는 일정에 내가 동행하게 되었다. 나는 농업전문가는 아니나 전통이 있는 유명한 충남 예산농고 출신에다 북에서 인정하는 부이사장 직함으로 방북하게 되었다. 나의 평양방문의 목적은 북한 농업지원단에 참가하여 최(철만)참사의 행방을 찾는 것이었다.
최참사는 해외동포원호위원회 미주 담당 참사에서 문책되어 노동당 당사편찬위원회로 전근해서 근무(내근)중이며 언제나 다시 다른 직책으로 나울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왜? 해외동포원호위원회 미주담당 참사(위원장 아래에 있는 챔임자)로서 어느 미국에서 온 불실한 사업가의 허풍에 속았기 때문이란다. 자칭 사업가의 대북지원사업에 대한 약속에 속아 이 재미동포 사기성 사업가를 상부에 추천하였는데 결국 북과의 실제 합작사업을 추진하는 단계에서 이 사업가의 바닥(마각)이 들어난 것이었다. 그 책임은 온전히 담당 책임자인 최참사의 몫이 되었고 내근으로 이동한 후에는 일체 이전 사업과는 관계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우리의 애국적이고 역사적인 인재양성의 부픈기대는 하나의 애처러운 일장춘몽으로 끝이 난 것이였다. 이로서 나의 방북여정은 끝장이 났고, 나에게 다시는 평양을 방문할 이유도 없었다.
1998년 평양 방문 (4) 천명
그러 함에도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평양방문을 하였던 것은 형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라는 그리스도의 교훈과 동족에 대한 민족사적 양심과 역사의식의 발로에서였다. 2001년 1월 그해 겨울은 참으로 혹독하게 추웠다. 산에 나무가 없어서 매년 되풀이되는 홍수피해로 흉작인데다가 혹독한 겨울을 맞아서, 북은 전국적으로 식량란과 난방에 곤역을 겪고 있었다. 북은 모든 비영리(NGO)지원단체에 SOS를 보내왔다. 물론 우리 도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재단의 주요간부들이 추념하여 긴급식량을 화차로 중국에서 구입하여 의주에서 평양으로 수송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 재단 이사장과 동행으로 평양 고려호텔에 투숙하였는데 그 큰 호텔에 난방을 하지 않고 작은 전기난로 하나씩 주어서 침대곁에 두고 간신이 새우잠을 잘 수 있게 하였다. 호텔과 고층 아파트의 온수는 평양 중앙공장에서 지하관을 통하여 공급한다고 하는데 앞에 보이는 고층 아파트들이 모두 난방이 없다 하니 걱정스러웠다. 점심식사를 위하여 평소에 다니든 식당에 가면 식당이 너무 추워서 외투를 벗지 못하였고, 금방 배달된 음식이 빨리 식으니 급히 먹고 나와야 하는데 종업원들은 외투가 없이 떨고 서 있으니 불쌍하고 딱하였다. 온 평양시 전체가 어름덩어리 같은 느낌인데 우리는 그 속에서 조국의 통일 염원을 기원하며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하던 하루 원호위원회 안내원중 우리와 친하게 지내던 한 분이 우리에게 주저하며 내놓은 부탁이 우리를 당황하게 하였다. 부탁인즉 우리들의 지원양곡 화차가 중국에서 들어오고 있으니 이것은 정부의 방침대로 인민의 식량배급으로 나가게 되는데, (해외동포들의 창구인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요원들이 지난 몇주째 식량배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서) 자기들에게 언제 배급되어 돌아올찌 기약이 없으니 만일 우리가 허락해 준다면 그중에 한 트럭분을 자기들이 긴급 수송하여 해외동포 원호위원회 요원들이 우선 배급을 받을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메인다. 이것이 당시 북에서 살고 있는 우리 형제 자매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나는 미국의 집에 돌아오며 다시 한번 다짐하였다. 우리 조국은 살아 남아서 하나의 민족으로 통일되고, 하느님의 섭리대로 동방의 등불로서 세계평화를 지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천명>이다.
그동안 나는 존경하는 부부가 주관 해온 북한 농업지원사업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선배이신 이사장이 병환으로 작고하신 다음 종자 전문가인 부인께서 재단 이사장이 되었고, 내가 부이사장을 맞게 되었다. 북에서는 이 분의 애국충정과 종자분야에서의 세계적인 전문성을 알고 농업성에서 직접 초청하고 자문하는 관계였다. 그리하여 오래전 부터 이분은 미국과 서구 선진농업 기술로 낙후한 북의 농업진흥을 위하여 도와주고 있었다. 수년전 처음에 이분을 만나서 관계를 맺게 한 사람이 또한 최(철만)참사였다. 그래서 이분도 최참사의 행방에 대하여 대단히 궁금해 온 터였다. 그간 이분은 거의 매년 두번씩, 봄 가을로 북행을 하면서 최참사를 만나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한채 이번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직영농장을 위하여 특별지도 자문차 방문하는 일정에 내가 동행하게 되었다. 나는 농업전문가는 아니나 전통이 있는 유명한 충남 예산농고 출신에다 북에서 인정하는 부이사장 직함으로 방북하게 되었다. 나의 평양방문의 목적은 북한 농업지원단에 참가하여 최(철만)참사의 행방을 찾는 것이었다.
최참사는 해외동포원호위원회 미주 담당 참사에서 문책되어 노동당 당사편찬위원회로 전근해서 근무(내근)중이며 언제나 다시 다른 직책으로 나울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왜? 해외동포원호위원회 미주담당 참사(위원장 아래에 있는 챔임자)로서 어느 미국에서 온 불실한 사업가의 허풍에 속았기 때문이란다. 자칭 사업가의 대북지원사업에 대한 약속에 속아 이 재미동포 사기성 사업가를 상부에 추천하였는데 결국 북과의 실제 합작사업을 추진하는 단계에서 이 사업가의 바닥(마각)이 들어난 것이었다. 그 책임은 온전히 담당 책임자인 최참사의 몫이 되었고 내근으로 이동한 후에는 일체 이전 사업과는 관계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우리의 애국적이고 역사적인 인재양성의 부픈기대는 하나의 애처러운 일장춘몽으로 끝이 난 것이였다. 이로서 나의 방북여정은 끝장이 났고, 나에게 다시는 평양을 방문할 이유도 없었다.
1998년 평양 방문 (4) 천명
그러 함에도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평양방문을 하였던 것은 형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라는 그리스도의 교훈과 동족에 대한 민족사적 양심과 역사의식의 발로에서였다. 2001년 1월 그해 겨울은 참으로 혹독하게 추웠다. 산에 나무가 없어서 매년 되풀이되는 홍수피해로 흉작인데다가 혹독한 겨울을 맞아서, 북은 전국적으로 식량란과 난방에 곤역을 겪고 있었다. 북은 모든 비영리(NGO)지원단체에 SOS를 보내왔다. 물론 우리 도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재단의 주요간부들이 추념하여 긴급식량을 화차로 중국에서 구입하여 의주에서 평양으로 수송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 재단 이사장과 동행으로 평양 고려호텔에 투숙하였는데 그 큰 호텔에 난방을 하지 않고 작은 전기난로 하나씩 주어서 침대곁에 두고 간신이 새우잠을 잘 수 있게 하였다. 호텔과 고층 아파트의 온수는 평양 중앙공장에서 지하관을 통하여 공급한다고 하는데 앞에 보이는 고층 아파트들이 모두 난방이 없다 하니 걱정스러웠다. 점심식사를 위하여 평소에 다니든 식당에 가면 식당이 너무 추워서 외투를 벗지 못하였고, 금방 배달된 음식이 빨리 식으니 급히 먹고 나와야 하는데 종업원들은 외투가 없이 떨고 서 있으니 불쌍하고 딱하였다. 온 평양시 전체가 어름덩어리 같은 느낌인데 우리는 그 속에서 조국의 통일 염원을 기원하며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하던 하루 원호위원회 안내원중 우리와 친하게 지내던 한 분이 우리에게 주저하며 내놓은 부탁이 우리를 당황하게 하였다. 부탁인즉 우리들의 지원양곡 화차가 중국에서 들어오고 있으니 이것은 정부의 방침대로 인민의 식량배급으로 나가게 되는데, (해외동포들의 창구인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요원들이 지난 몇주째 식량배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서) 자기들에게 언제 배급되어 돌아올찌 기약이 없으니 만일 우리가 허락해 준다면 그중에 한 트럭분을 자기들이 긴급 수송하여 해외동포 원호위원회 요원들이 우선 배급을 받을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메인다. 이것이 당시 북에서 살고 있는 우리 형제 자매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나는 미국의 집에 돌아오며 다시 한번 다짐하였다. 우리 조국은 살아 남아서 하나의 민족으로 통일되고, 하느님의 섭리대로 동방의 등불로서 세계평화를 지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천명>이다.